
1990년대 초, 완벽한 조각 비주얼과 압도적인 스타성으로 대한민국에 ‘치마바지’와 ‘X세대’ 열풍을 불어넣은 스타가 있다.

바로 가수 김원준이다. 당시 혜성처럼 등장해 가요계를 매료시켰던 그이지만, 그 화려한 성공 뒤에는 집안의 후광 대신 완고했던 아버지의 거센 반대가 있었다.


김원준의 아버지는 유명 산부인과 병원장으로, 유복한 환경 속에서 자란 아들이 연예인의 길을 걷는 것을 극심하게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원준은 데뷔 순간은 물론 정상의 자리에 올랐을 때조차 “가수 활동을 그만두라”는 아버지의 강경한 태도와 마주해야 했다.
하지만 김원준은 단순한 ‘얼굴 천재’ 아이돌이 아닌, 직접 곡을 만드는 뛰어난 싱어송라이터였다.


1992년 자작곡인 데뷔곡 ‘모두 잠든 후에’로 가요톱10 5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골든컵을 품에 안았고, 3집 타이틀곡 ‘너 없는 동안’ 역시 직접 작사·작곡해 지상파 음악 방송 1위를 싹쓸이하는 등 독보적인 음악적 역량을 입증했다.
그러나 이처럼 발표하는 자작곡마다 메가 히트를 기록했음에도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기는 쉽지 않았다. 차갑게만 보였던 아버지의 반대 뒤에 묵묵한 사랑이 숨어 있음을 깨달은 것은 훗날의 일이었다.
김원준은 과거 방송을 통해 우연히 아버지의 차량을 탔다가 자신의 5집 대표곡인 ‘쇼(Show)’ 카세트테이프가 플레이어에 들어있는 것을 목격했던 순간을 회상했다.
겉으로는 엄격하게 아들의 가요계 생활을 반대했지만, 뒤에서는 아들의 노래를 조용히 듣고 있었던 것이다. 김원준은 만감이 교차했던 당시를 떠올리며 좀 더 살갑게 대해주셨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과 함께 아버지의 속깊은 애정을 고백했다.
아버지의 엄격한 철학은 김원준이 큰 시련을 겪었을 때 더욱 빛을 발했다. 김원준은 정규 5집 활동 당시, 아버지에게 성공적인 음악 사업가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대형 녹음실 스튜디오 사업에 도전했다.
그러나 후배들에게 선뜻 스튜디오를 무상으로 대여해 주는 등 온정주의식 운영이 이어지면서 스튜디오는 아지트화되었고, 비즈니스 엉킴과 정산 문제로 결국 막대한 손실을 입으며 실패로 끝났다.
당시 벼랑 끝에 몰린 김원준은 병원장이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돌아온 것은 “네가 시작한 일은 스스로 해결하라”는 냉정한 거절이었다.
경제적 여유가 있음에도 단칼에 거절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당시에는 큰 서운함을 느꼈지만, 김원준은 시간이 흐른 뒤 그것이 자신을 굳건하게 만든 인생 최고의 수업이었음을 깨달았다.
결국 혹독한 시련을 통해 ‘비싼 수업료’를 치른 김원준은 그 경험을 발판 삼아 험난한 가요계와 세상에서 스스로 살아가는 무기를 얻게 됐다.
화려한 스타의 삶 뒤에 숨겨진 자작곡가로서의 음악적 재능, 그리고 아버지와의 사연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팬들에게 가수 김원준이라는 인물을 더욱 깊이 있게 기억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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